향기나는 칼럼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얼마 전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했습니다. 사무총장은 "우리 시대 본질적인 의미의 세계 보건 위기"라고 우려하면서, "코로나19 같은 위기는 인간성(humanity)의 최고와 최악을 낳는 경향이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마스크나 생필품 등의 사재기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위기에 처한 이웃을 돕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소식이 겹쳐 들려오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그가 진단한 것처럼 인간성의 최고와 최악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위기의 대구, 경북지역을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달려 나갔습니다. 오랜 시간 착용한 방호복에 눌린 상처 때문에 일회용 반창고를 얼굴에 더덕더덕 붙인 간호사들의 모습은 대단히 상징적인 그림으로 마음에 남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들만의 특별한 신앙 때문에 감염사실을 숨기며 지내다 거대한 감염원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이단, 사이비의 반사회적 교리가 이런 상황들을 초래해 버린 것입니다. 사재기보다 더한 최악의 인간성을 우리는 사이비 ‘종교집단’의 이기적 성향을 통해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통의 교회들은 어떤 모습인가요? 교회의 근간인 생명에 대한 우선순위 때문에 이런 위기 속에서 그 이타성, 연대성으로 원래 가지고 있는 그 존재가치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나요? 만약 공공의 안전과 평화에 대한 배려는 뒤로하고, 이 중요한 시간들을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모습으로만 흘려 보내버린다면, 세상은 기독교에 대하여 이단, 사이비와 정통의 구분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고, 교회가 그분의 몸이라면, 교회의 우선순위도 하나님의 형상, 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분이 그렇게 사셨으니까요. 성경이 온통 그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예배를 포함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전례(liturgy)의 본질적 가치도 결코 준수자체에 있지는 않을 겁니다.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누가복음 6:9)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질문은 몸 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우선순위를 다시 점검하게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기로 늘 다짐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성육신과 사역, 고난과 부활의 삶의 궤적 전체가 생명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우선순위를 기억해야 합니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지금 그분의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는 사순절(2.26-4.12)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든 이타성과 연대성의 핵심은 여전히 ‘사랑’ 입니다. 코로나19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그 사랑의 자리로 부르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익숙한 자리를 떠나 영문 밖으로, 예수님과 함께 걸어 나가는 용감한 걸음은 ‘사랑’입니다. 온 세상을 위해 저주와 고난의 길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신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이길승 목사(가까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