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팅 H[방콕뮤직]

시인과 촌장 ‘사랑일기’

   오늘은 시인과 촌장의 1986년 앨범 [푸른 돛]에 수록된 ‘사랑일기’라는 노래를 소개해 드립니다. 80년대 중, 후반은 그 때가 한국대중음악사의 정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명반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지요. 지금은 사라진 [동아기획]은 정말 멋진 앨범들을 많이 만들어 내었습니다. 만약 그 회사가 지금까지 같은 작업을 계속해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그 시절 여러 명반들 중에서, 시인과 촌장의 음반도 빼 놓을 수 없는 걸작입니다. 

 싱어송라이터 하덕규와 기타리스트 함춘호의 ‘시인과 촌장(詩人과 村長)’은 작가 서영은의 소설제목이기도 합니다. 하덕규는 소설 <시인과 촌장(1980)> 이 그리고 있는 우울한 유년의 풍경이 당대의 암울한 시대와 호응하고 있어서 소설의 제목을 그대로 그룹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회고 합니다. 

 과거 미술학도였던 하덕규는 80년대의 엄혹한 시대를 통과하며 특유의 회화적 어휘들을 동원해서 자신이 그리고 싶었던 희망의 장면들을 뭉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사랑일기’라는 노래가 대표적입니다. 작가의 시, 공간에 잠시 머물러 의미를 새겨보면 마치 노랫말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합니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날으는 새들의 날개 죽지 위에
첫차를 타고 일터로 가는 인부들의 힘센 팔뚝 위에
광장을 차고 오르는 비둘기들의 높은 노래 위에
바람 속을 달려 나가는 저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에
사랑해요라고 쓴다

피곤한 얼굴로 돌아오는 저 나그네의 지친 어깨 위에
시장어귀의 엄마 품에서 잠든 아가의 마른 이마 위에
공원길에서 돌아오시는 내 아버지의 주름진 황혼 위에
아무도 없는 땅을 홀로 일구는 친구의 굳센 미소 위에
사랑해요라고 쓴다

수없이 밟고 지나는 길에 자라는 민들레 잎사귀에
가고 오지 않는 아름다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고향을 돌아가는 소녀의 겨울 밤차 유리창에도
끝도 없이 흘러만 가는 저 사람들의 고독한 뒷모습에
사랑해요라고 쓴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성격의 엄혹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하면서 온 세상이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개학도 연기 되었고, 말 많던 올림픽도 1년 뒤로 연기되었습니다.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던 일정들이 하나, 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더 중요한 것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생명, 이웃, 가족, 쉼, 그리고 평범한 우리의 일상입니다. 지루해보였던 우리의 일상이 하나하나 얼마나 소중한 그림이었는지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바라보며 ‘사랑해요’라고 절로 노래가 나오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멈춰선 시간이 만들어낸 이 ‘사랑고백’은 사실 우리의 주변상황들과 상관없이 지속되었어야 했습니다. 일상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우리 삶의 본판이니까요. 앞으로 상황이 좀 나아지더라도, 다시 달려야 하는 하루하루를 살게 되더라도, 우리는 이제 일부러 멈춰 설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멈춘 자리에서 가만히 우리의 소중한 일상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사랑일기를 써 내려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길승 목사(가까운 교회)